<오펜하이머> 영화 보기 전에 먼저 알아두면 좋은 이야기
Part. 2 맨해튼 프로젝트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된 상황에서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많은 과학자들은 나치가 먼저 원자 폭탄을 제조한다면 이는 전인류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위험성을 편지로 작성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서명이 쓰여있는 편지를 받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극비리에 맨해튼 프로젝트를 승인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는 어떻게 하면 연쇄반응이 완벽하게 일어날까 생각하여 천연 우라늄에서 우라늄-235를 분리시키는 공정과 원자 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 질량을 결정하는 연구를 시작합니다. 연구 결과 우라늄-235가 100kg 있어야 된다고 보고합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942년 초 시카고 대학 운동장에 세계 최초의 핵 반응기를 만들어 세계 최초로 핵분열 연쇄 반응에 성공하게 됩니다. 연쇄 반응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죠.
1942년 6월 본격적으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 프로젝트의 기초는 어디까지나 군사작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총책임자는 미 육군 사령관인 레슬리 그로브스가 맡아서 진행하게 됩니다. 프로젝트 전체의 총괄 지휘는 그로브스 장군이 맡고,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 자체를 개발하는 이론 및 기술 분야의 책임자를 맡게 됩니다. 전혀 다른 분야의 두 사람이 만나 다행히도 완벽한 콤비가 됩니다. 그로브스는 새롭게 지을 군사 연구소 자리를 물색했는데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사랑했던 뉴멕시코의 로스 앨러모스를 추천했습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던 터라 연구소 자리로 적합했고, 드디어 1943년 3월 로스 앨러모스에 연구소가 완공됩니다. 처음엔 100명 정도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로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3년 정도 지나니 2000명의 군인들과 군인의 가족을 포함한 4000명의 민간인이 사는 마을이 되었다고 합니다.
연구를 진행하는데, 우라늄은 농축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에 원자 폭탄으로 쓸 수 없기 때문에 다량의 농축된 우라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농축된 우라늄을 구하기도 힘들고 엄청난 시간과 비용 및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플루토늄입니다. 플루토늄은 우라늄보다 분리하고 농축하는 것이 간단하며, 임계 질량이 우라늄보다 작기 때문에 다른 원자 폭탄의 재료로 적합했습니다. 하지만 플루토늄을 쓸 경우엔 총열로 돌진해서 충돌시키는 방식으론 핵분열 연쇄반응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새로운 방식이 1)축구공 형태로 정 가운데에 플루토늄이 있고 2)겉을 폭발물이 감싸고 있어야 하며 3)폭발물이 동시에 터졌을 때 안으로 모이는 충격파로 핵분열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일 어려운 것은 충격파가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한 곳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 '계산의 왕'이었던 폰 노이만이 10개월간 계산한 결과, 축구공을 32면체의 구조로 만들면 충격파가 정확하게 한 점에서 모인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1945년 4월 12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로스 앨러모스의 모든 작업이 중단됩니다. 같은 해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합니다. 그리고 8일 뒤 독일이 항복을 선언합니다. 나치와 히틀러를 굴복시키기 위해 원자 폭탄을 만든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의미가 있나 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태평양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는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원자 폭탄의 타깃은 일본으로 바뀌었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원자 폭탄의 사용을 반대하였지만 오펜하이머는 향후 전쟁의 억제를 위해 핵폭탄 위력의 필요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여 어느 곳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릴지를 논의하였습니다. 최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을 줘야 하기 때문에 많은 노동자가 있는 곳이면서도 중요한 유적이나 그 나라의 핵심적인 지역은 피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기로 결정합니다.
1945년 7월 16일, 새로운 방식으로 만든 플루토늄 폭탄을 실제로 검증해 보기 위해 세계 최초의 핵실험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비밀이었던 이 실험에는 '트리니티'라는 암호명이, 폭탄에는 '가제트'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오전 5시 29분 45초에 성공적으로 폭발했고 하늘에 엄청난 섬광과 12km 상공까지 솟아오른 버섯기둥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실험장소로부터 240km나 떨어진 곳에서도 폭탄이 만들어낸 빛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45년 8월 6일 드디어 실전의 날이 왔습니다. 조종사였던 폴 티비츠의 어머니의 이름을 딴 최초의 핵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우라늄 기반의 '리틀 보이'를 투하합니다.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기반의 '팻 맨'을 투하합니다. 폭발의 위력은 어마어마하였습니다. 결국 일본은 그해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으며 국가적 영웅이 됩니다. 각종 잡지와 신문을 장식하게 되고 로스 앨러모스 총책임자 자리에서는 물러나게 됩니다.
당시 소련이 독자적으로 원자 폭탄을 개발한 사실을 알게 되고, 트루먼 대통령은 오펜하이머를 불러 이 기세를 몰아 원자 폭탄보다 더욱 강력한 수소 폭탄을 만들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원자 폭탄의 엄청난 피해를 목격한 뒤 이건 잘못됐다고 생각한 오펜하이머는 수소 폭탄 개발 계획을 저지합니다. 수소 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그룹과 오펜하이머와 같이 반대하는 그룹이 있었지만 결국엔 수소 폭탄을 개발하게 됩니다.
소련이 불과 몇 년 만에 원자 폭탄을 개발했다는 점, 미국의 수소 폭탄 개발을 반대했다는 점, 그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공산당원이었다는 점 등등 여러 이유로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간첩이었다는 혐의를 받게 됩니다. 이에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보안 청문회가 열리게 됩니다. 당연히 오펜하이머는 모든 혐의를 부인합니다. 하지만 그의 보안 허가는 취소되고 사생활도 공개됩니다. 미국의 영웅이었던 그는 한순간에 몰락하게 됩니다. 실제로 소련의 스파이는 오펜하이머가 아닌 독일과 영국의 이중 국적을 가진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였습니다. 매 순간 고통받으며 담배로 버틴 오펜하이머는 결국 인후암 진단을 받고 62세에 사망하게 됩니다. 단지 애국심 하나로 국가에 도움을 주기 위해 일평생 몸을 바쳐 연구했던 그였지만 간첩으로 오해받아 고통으로 숨진 비운의 남성이 되었습니다. 2022년 12월 16일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간첩 혐의를 철회한다고 밝혔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련 스파이 누명을 68년 만에 벗게 된 것이죠.
장장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이지만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와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이미 호불호가 갈리는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방식으로 풀어나간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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